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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구의 길, 이승만의 길

김석수 칼럼니스트

동아경제신문 | 기사입력 2023/12/12 [12:33]

[칼럼] 김구의 길, 이승만의 길

김석수 칼럼니스트

동아경제신문 | 입력 : 2023/12/1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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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수 칼럼니스트.     ©

[동아경제신문] 이승만은 극우 정치인의 상징이다. 땃벌떼 깡패정치로 독재하다 4.19 학생과 시민들을 학살하고 쫒겨난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독재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때문에 그의 기념관을 짓자는 시민운동은 전국민이 선뜻 찬성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면 그와 경쟁했던 김구는 민족의 선생으로 추앙받는다. 지금도 그는 비판대상에서 제외되는 성역이다. 그의 이름 뒤에는 늘 ‘선생’이란 수식어가 이어졌다. 

 

알다시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과 의열단, 광복군 이미지다. 해방 후에는 통일독립을 위한 비운의 정치인이다. 반면 이승만은 친일세력으로 그려졌다. 북한 김일성 내각과 달리 초대 내각을 독립운동가들로 꾸렸으면서도 반대파들에 의해 친일세력으로 그려졌다. 독재를 하다 4.19민주화운동으로 쫒겨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그들이 살아온 길은 그대로인데 사람들 평가가 달라진다. 그 이유는 국가수립과 국력 신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승만이 자유주의(자본주의)를 선택해서 선진국으로 발전해온 역사를 바라보는 국민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놀라운 일이 있었다. 1946년 7월에 미군정청이 실시한 ‘미래한국통치구조’에 대한 여론조사였다. 국민 70%가 사회주의, 10%가 공산주의, 13%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전력이 있는 강정구 교수는 당시 우리 국민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조사결과를 반대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당시 국민은 자본주의가 개인의 소유를 절대시하고, 공산주의가 완전 부정한 반면, 사회주의는 개인소유 인정하되 공익을 위해 제한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같은 조사에서 정부형태는 대의제도를 통해 모두가 같이 지배하는 정부형태(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여론이 85%, 한 계급이 지배하는 정부형태(사회주의)는 5% 지지로 나타난다. 또 1947년 여론조사는 국민 80%이상이 미국식 3권 분립체제를 찬성했다. 이보다 앞선 1946년도 3월 중순의 2차례 지도자선호 여론조사에서 1위가 이승만(30%), 2위 김구(20%), 3위 여운형(15%)으로 나타났다.

 

국민생각을 여실히 드러낸 여론조사는 농지개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북한농지개혁과 같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대해 73% 국민이 반대하고 21%만 찬성했다. 농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해줘야 한다는 데 찬성한 국민이 66.3%였고 33.7%가 반대했으나, 유상분배는 72.9% , 무상분배 27.1%로 나타난다. 따라서 좌파들이 해방 직후 국민 절대다수가 쏘련식 사회주의를 지향했다는 주장은 당시 국민생각을 왜곡한 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면 왜 국민들은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을까. 아마도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으로 오늘의 번영국가를 만든 출발점으로 이승만을 평가하는 듯하다. 비록 독재정치로 쫒겨났지만,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체였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대통령으로 기리자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 발견된 미군정청 한국정치인 담당 버치중위의 메모를 보면, 알려진 바와 달리 이승만의 집권과정은 순탄치 않다. 당초 버치중위는 물론, 하지 사령관도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이들은 초기 제거대상으로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을 함께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 군용기로 이승만 귀국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 사령관이 도쿄로 날아와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다. 

 

미국의 필요에 의한 이승만 집권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현실정치감각도 탁월하게 발휘된다. 그 대표사례가 유엔의 한국승인 성공이었다. 이는 훗날 6.25전쟁에서 유엔군을 불러들인 근거가 되었다. 정부수립 1달 뒤인 1948년 9월 21일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 이승만은 장면, 장기영, 전규홍을 파견해 한국을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받는다. 이승만이 남한단독정부 수립주장으로 이어진 제주4.3과 여순사건 등 자국민 학살이미지로 국제사회에서 부정적인 상태에서 따낸 성과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을 국가로 승인한 곳은 바티칸 한곳 뿐이었고, 초대 주한 미대사인 무초도 정부수립 당시엔 대사가 아니라 단순‘대표’였다가, 1949년도에야 비로소 대사로 임명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쨌든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침략에서 지켜낸 것은 탁월한 선견지명이라고 할수 있다. 

 

그의 특장기인 외교능력은 명분보다 실리에 강했다. 통일 한국을 주장한 김구와 달리, 정읍발언을 통해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알다시피 6.25는 구냉전이 만든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 이전에 세계는 이미 이념대결로 가고 있었다. 이 흐름을 이승만은 빠르게 간파했다.

 

세력기반이 취약한 김구 등이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과정을 보며 통일한국은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자유주의시장경제 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로 세워졌다.

 

반면 김구는 통일한국이란 명분에 사로잡혀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통일조국독립이란 명분만 주장하다 암살당한다. 당시 세계사가 냉전대결구도로 들어가는 것을 이승만은 재빨리 간파해 대응한 반면, 김구는 명분론에 얽매여 비현실적 주장만 한 셈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자본주의)가 집단주의 계획경제(사회주의)보다 생산력이 탁월하다는 점은 90년대 동유럽사회주의 붕괴와 소련해체로 증명된 바 있다. 생산성에서 경쟁자체가 되지 않는 양 체제간 경쟁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집단주의 계획경제를 이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런 현실이 나타나기도 전에 자유주의시장경제의 우월함을 실천에 옮겨 자유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마치 2019년 블랙홀을 영상으로 찍은 인류의 성과물을 100년 전인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블랙홀 존재를 주장한 아이슈타인의 선견지명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여러 가지 그의 과오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경제 나라를 만들고 지킨 것은 오늘의 중추국가 대한민국에서 보자면 탁월한 판단과 선택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 우리를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 미래 시점에서 지금의 우리를 보면 된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럴 때 역사는 에드워드 카아가 말한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새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 역사를 미래로 연장시키지 못하고 과거만 파먹고 사는 외눈박이 관점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같은 책 한권 읽고 우리 현대사를 다 안다는 무지다. 그런 점에서, 독재자 이승만의 행보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생존과 번영을 가능케 한 선견지명을 본다면, 세상을 온전한 두 눈으로 바라보는 종합과 균형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실리를 통해 명분을 만든다.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만큼 큰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삶을 보며, 우리가 좀 더 먼 곳에 시선을 두고 걸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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